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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은 어떤 곳?
형제복지원은 1960년 7월 20일 부산 진구 감만동 84번지에서 무의무탁한 아동 104명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군인 출신인 박인근(개명 전에는 박성학)이 1958년 권투 체육관을 운영하던 곳이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자 지역 치안 유지에 군이 투입됐고, 박인근은 부산 영도경찰서에 파견을 나갔다. 당시 경찰에서 사회를 불안하게 하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양아치, 소매치기, 깡패와 부랑청소년이 검거됐는데, 부산시가 수용해 숙식을 해결할 대책이 없어 박인근이 자신의 체육관에 수용한 것이 시작이다. 이렇게 미인가 시설인 ‘형제육아원’이 문을 연 것이다. 1976년에 주례동으로 이전됐다. 이때 형제육아원에서 형제원으로 법인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 1991년 실로암집 등을 거쳐 형제복지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내무부훈령410호다. 내무부훈령410호에 대해서는 아래에 기술해 뒀다.
피수용자 3만명 넘어
1960년 이후 1990년 초반까지 형제복지원이 운영되던 기간 수용자들이 사실상 모든 피해자다. 정확한 입퇴소자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2022년 진실과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는 당시 형제복지원이 매달 출간한 ‘새마음’ 지에 실린 통계를 통해 개략적인 수치를 추산했다. 새마을지의 통계 자료는 계산상 오류가 많아 100% 믿을 수는 없으나, 지난 2020년 부산 동아대 산학협력단에서 진행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와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6년까지 피수용자 총 규모는 약 3만8000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운영 기간은 이보다 길기 때문에 피해자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40대 초반에 사망
형제복지원의 정확한 수용인원이 밝혀지지 않지만, 사망자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일부 조사된 내용을 보면,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사망자는 135명에 이른다. 1986년 수용인원이 3164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망률이 4.3%다. 당시 60세 이하 국민 사망률(0.318%)과 비교하면 13.5배 높은 수치다.
‘집단시설 인권침해 실태조사 연구용역 사업’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5개 부랑인시설의 1986년도 사망률은 8.2~12%에 이른다. 형제복지원의 사망률이 낮게 보이지만, 진실과화해위 보고서에서는 몇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먼저, 형제복지원에는 타시설 대비 아동인 피수용자가 16%로 높다. 또 재원기간이 다른 시설은 590일반면, 형제복지원은 174일이다. 단기 피수용자가 많다면 가혹행위 노출기간이 짧고 그만큼 사망에 이르는 가능성도 더 낮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형제복지원의 사망률이 절대 낮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연령대를 감안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1985~1988년 사망자의 평균 연령은 남자 44.5년, 여자 38.6년으로 전체 43.4년에 불과하다. 당시(1985년) 평균 수명은 남자 64.4년, 여자 72.8년으로 전체 68.4년이다. 전체적으로 25년이나 일찍 사망한 것이다.
첫 수사는 부산지검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 손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수사는 1986년 12월 21일 부산지검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의 인지수사에서 시작됐다. 김 검사가 울주군 야산을 방문했다가 강제노역 정황을 파악한 그는 1987년 1월 16일 형제복지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하고 6명을 구속해, 1월 28일 모두 기소했다.
당시 김주호 부산시장은 박인근 원장 구속 다음날 김용원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석방을 요구했다고 한다. 김용원에 따르면, 보건사회부 장관과 청와대 정무수석이 박인근 구속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을 통해 박 원장 석방을 지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로 보인다. 그럼에도 김용원 검사는 1987년 6월 9일 박인근에게 징역 15년 벌금 6억8178만원을 구형하는 등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구형했다. 1심은 박인근에게 징역 10년과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했으나 항소 이후 법정 공방이 이어졌고, 결국 징역 2년 6개월이 확정돼 1989년 7월 20일 출소했다.
인지수사했던 검사는 인권위원으로 그런데…
해당 검사가 정의로워 보이지만, 그 이후 행적은 찾아보지 말자. 마음만 아프다. 김용원 검사는 훗날 국가인권위 인권위원이 됐지만 “여성 접대원 술시중이 무슨 단속대상이냐”, “인권장사치가 회의 내용을 왜곡한다”, “기레기가 쓰레기 기사를 쓴다” 등의 막말을 쏟아냈다. 인권위원장에서 탈락하자 “후보추천위가 잡스럽고 역기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피해자 진상규명 운동
1987년 검찰 수사 종결 이후 진상규명 요구가 제기되지 못하다가 2012년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했고, 이후 수기를 담은 책 ‘살아남은 아이’ 출간 이후 쟁점화됐다.
2014년 진선미 의원이 ‘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 사건 등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 발의됐다. 19대 국회 임기종료로 폐기됐다.
2016년 20대 국회에서 같은 법안을 재발의했고, 법안 심사를 담당하는 국회 행정안전위에서 과거사정리법 개정안과 함께 논의하기로 했다.
과거사정리법개정안은 20대 국회 임기 종료 직전인 2020년 6월 9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내무부훈령 410호란?
내무부훈령 410호는 1975년 12월 15일 제정됐다. 내무부훈령이 제정되기 전 상황을 먼저 봐야 한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정 중지 및 국회 해산, 정치활동 목적으로 집회금지, 언론출판방송 사전검열, 위반자에 대한 영장없이 수색 구속 등을 실시했다.
1972년 11월 12일 국민투표로 유신헌법이 제정됐다.
1973년 3월 12일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개정을 통해 경찰서장, 경찰국장의 판단으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반할 우려,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와 시위를 금지했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로 집회 및 시위 등 각종 정치행위를 금지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수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75년 7월 16일 사회안전법을 제정해 국가보안법 반공법 등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 보호관찰, 주거제한, 보안감호 등 보안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75년 12월 15일 제정된 내무부훈령 410호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속에서 만들어졌다.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이 법률에 의해 막히는 상황이다.
아직 1심이지만 이제서야 배상판결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23년 12월부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판결이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4년 8월 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7부(이상원 부장판사)는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6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가 총 14억4000만원과 지연이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적법한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채 임의로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신체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는 점이 인정되고, 국가는 이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원고는 2022년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로 인정받은 이들이다.
이 같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 배상 소송은 전국적으로 30건 이상으로 파악된다.
서울중앙지법은 2023년 12월21일 피해자 2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소송에서 145억8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24년 1월31일에는 피해자 1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45억3500만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모두 수용 기간 1년마다 8000만원을 기준으로 위자료액을 산정한 것으로 이번 판결 역시 같은 기준이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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